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량 해전 (문단 편집) === 반전된 전황 === 이 전투로의 승리로 남해안 일대의 조선 피난민들에게 구심점이 생기게 되었고, 수군의 건재함이 알려져 재건이 시작되었으며, 서해안의 왜 수군의 활동이 제약받게 되었다. 일본 일각에서는 명량 대첩이 전쟁의 전체적인 국면에 영향을 주지 못한 국지적인 전투라고 주장한다. 일본 수군이 서해에 진입했고 이순신이 이를 피해 북쪽으로 퇴각했으므로 명량 대첩은 전술적인 작은 패배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9월부터 시작되는 일본군의 후퇴 이유도 단순히 월동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월동이라는 이유가 아주 틀리진 않았다. 명령해전의 큰 성과 중 한 가지가 바로 월동하고자 왜군이 전방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한 것이다. 명량 해전은 양력 10월 26일에 있었다. 이순신 부대가 고군산도에 진을 친 때는 겨울 초입인 양력 11월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만약에 왜 수군이 전라도 해안에서 원하는 만큼 활개칠 수 있었다면 전주나 남원을 점령한 왜 육군에게 겨울을 버틸 물자를 제공할 수 있었지겠만, 근처에 있을 조선 수군 때문에 위축된 채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이 한 행동은 남해안으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임진년에 보급이 없는 상태에서 버텼다가 손실을 입는 일[* 1593년 한양을 내주고 남하할 때, 그들은 처음 투입 병력의 50%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 을 예방하고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일본군이 물러난 것도 한겨울에 계속 밀려가는 양상이었음이 조선과 일본 양측의 개인 기록들에서 확인된다. 일부 일빠들의 위와 같은 주장대로라면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 해군의 승리가 된다.[* 미 해군 역시 일 해군 항모를 격침시킨 후 전장에서 전함으로 구성된 일 해군 본대의 추격을 피해 후퇴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은 왜군이 직산[* 현재의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인근에 [[수도권 전철 1호선]] [[직산역]]도 있다.]까지 다다랐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한양의 주민들도 모조리 피난을 떠난 상황이었다. 일본 측의 종군승이던 케이넨의 일기에도 "한양을 치기 위한 회의를 했다.", "한양으로 가는 길이 즐겁다." 하는 말이 나온다. 일본군은 한양을 재점령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9월 10일 안성을 거쳐 죽산까지 북상했던 일본군은 명량 해전 직전에 돌연 남쪽으로 철수하는데, 케이넨의 일기에 의하면 이는 '항구'로 가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전라남도 해안을 따라서 남쪽으로 후퇴하다가 남해안 순천에 자리잡았는데, 그들 입장에서 안정적인 보급을 받으면서 월동할 수 있었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즉 당시 일본군의 후퇴에는 __해상으로의 보급__이라는 이유가 있었고, __보급만 잘 된다면__ 한양을 점령하기 위한 준비가 갖춰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보급마저도 명량 대첩 때문에 틀어졌다.''' 육로보급의 경우 백두대간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산지를 넘어야하는데, 그 와중에 먹을 식량과 쌀을 호위할 병력 우마지기들이 먹을 식량까지 같이 가져 가야 한다. 게다가 일본은 점-선만 간신히 장악했을 뿐 면을 장악하는 데에는 실패해 후방에 의병은 물론이고 정유재란쯤 되면 아예 조선 정규군[* 보통은 의병이 함께 편제되었다. 가장 중요하다고 할수 있는 부산에서 엎어지면 코닿을 곳에있는 경주에서조차 임진왜란 발발 4개월뒤에 관군과 의병에 의한 1차,2차 [[경주 전투]]가 이루어졌을 정도였다.]이 활개치고 다닐 지경이었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왜군이 호남 평야를 점령했다 하더라도 전 군을 먹일 수 있는 보급을 충청도전선까지 보내기는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 더군다나 경로 중간을 노리고 있을 조명연합군을 일일이 박살내면서 수송해야 했다]. 이쯤 되면 육로 운송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짓으로, 왜 조선 조정이 근세 말까지도 한강 뱃길로 세수를 확보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현대도 마찬가지인데 육상 물류 운송수단이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으로 발달한 현대에도 일정 규모 이상의 물류 물량이라면 같은 양을 옮기는 데에는 수운을 활용하는 게 압도적으로 싸다.] 수군이 금강에 진입해 공주, 좀 더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와 청주쯤에 보급거점을 확보했다면 왜군이 구태여 점령지를 다 포기하고 오로지 월동만을 위해 경상도까지 철수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안정적인 보급을 받으며 충청도 일대에서 버티고 앉은 왜군을 조명연합군이 밀어내기 위해서는 더 큰 희생을 감수했어야 했을 것이다. 전라도 방어선이 박살나 호남평야가 왜군의 직접적인 보급처가 되는 것은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전근대 금강 수운은 부강까지 올라왔으며 [[https://books.google.co.kr/books?id=HVOUCwAAQBAJ&pg=PA246&lpg=PA246&dq=%EB%AF%B8%ED%98%B8%EC%B2%9C+%ED%8F%AC%EA%B5%AC&source=bl&ots=Iyk0q4kXme&sig=8LQhk7paMfvI0m6GyPAxcaSxGlg&hl=ko&sa=X&ved=2ahUKEwjagtLT_trfAhWC-mEKHQ6rAWcQ6AEwB3oECAcQAQ#v=onepage&q=%EB%AF%B8%ED%98%B8%EC%B2%9C%20%ED%8F%AC%EA%B5%AC&f=false|1927년 일제의 자료]]를 보면 공주 100석, 대평리·부강 60석까지 운항이 가능했다고 한다. 토사의 퇴적이 덜했던 16세기 말엽이라면 이보다 항행조건이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 수계까지 포함하면 '''오근장'''까지도 19세기 말엽까지 배가 바로 들어올 수 있었다. [[http://glob.egloos.com/v/3411772|문제중년의 포스팅]]에 따르면 센고쿠시대 사무라이들은 하루 쌀 2홉반을 기준으로 삼았으니, 60석 선박이 드나든다면 배 한 척으로 하루 식량 2만 4천 명분을 실어나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당연히 서해안 진입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일본군이 단순히 월동 차원에서 철수할 정도로 여유로운 입장이었다면, 굳이 한겨울에 고생해가면서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을 이유가 없다. 즉 왜군은 수군의 서해안 진입이 좌절된 시점에서 다시 봄이 온들 재북진은 엄두도 못 내고 그저 경상도 연안에 틀어박혀서 [[존버]]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게다가 국지적인 전투라기에는 일본 수군의 피해 규모가 상당히 컸음도 사실이다. 물질적인 피해뿐 아니라 정신적인 피해도 엄청났을 것이다. 최소 10배 이상의 전력에 내로라하는 수군 장수들과 정예병들이 총출동했는데 고작 13척의 적선에 장수들 다수가 전사하고 대부분이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도망친 걸로 모자라서 명량 대첩이 끝나고 얼마 가지도 않아서 원균이 말아먹은 전력에서 절반 이상이 복구가 됐다는 소식까지. 사기는 바닥을 치고 일본 수군들은 이순신이 버티고 있는 조선 수군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전투는 전황에 일정한 영향을 끼칠 때 비로소 전략적 목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일본 수군의 작전이 전황에 끼친 영향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명량 대첩에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끝장내고 거점을 만들었다면 임진왜란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조선 전체를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명나라와의 교섭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을 처치하지도 못하고, 조선 수군을 격파하지도 못하고, 서해안에 확고한 거점을 만들지도 못했으므로, 명량 해전은 전술과 전략에서 완벽하게 '''일본의 원정 실패'''로 이어지는 첫 걸음이 되어버린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